[한경포럼] 얼렁뚱땅 공화국

입력 2015-10-20 18:28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18일 한·미 정상회담 성과를 브리핑하며 “첫 번째 경제 성과로는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대해 미국의 환영 및 긍정적 입장을 재확인한 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양국의 공동설명서 내용은 이와는 좀 다르다. ‘미국은 TPP에 대한 한국의 관심을 환영한다는 것을 재확인한다’로 돼 있다. 안 수석은 미국이 한국의 ‘참여’를 환영했다고 밝혔지만 설명서는 한국의 ‘관심’을 환영한다인 것이다.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나라든 TPP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미국 입장에선 그걸 굳이 말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참여는 전혀 다른 문제다.

지난 8월25일 남북 고위급 협상이 타결됐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북한의 지뢰 도발에 대해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낸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브리핑했다. 하지만 남북 간 합의문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합의문은 ‘북측은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로 돼 있다. 북측이 ‘도발’했다는 표현은 없고 그저 군인들이 다친 게 안됐다는 정도다. 게다가 재발 방지 약속은 합의문 어디에도 없다. 브리핑과 합의문은 많이 달랐다. 며칠 뒤 북측은 “남측 군인들이 당해서 안됐다는 뜻이었지 결코 사과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일이 자꾸 반복되고 있다. 청와대나 정부가 중차대한 합의문이나 문서의 구체적 내용과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얼렁뚱땅 둘러대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마치 모든 게 잘 해결된 것처럼 포장해서 국민들을 속이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정도다.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반도 긴장 조성에 반대한다”고 말한 것을 우리 정부가 북한의 도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도 비슷하다. 청와대나 정부는 외교관계에서 협정이나 합의문 같은 것은 해석상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변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난달 13일 타결된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보면 이런 일이 비단 외교관계에서만 생기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노·사·정은 극적 대타협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이슈가 됐던 일반해고 요건 완화나 취업규칙 변경 문제는 모두 결론이 없었다. 합의문을 보면 ‘구체적 기준과 절차를 사후에 명확히 하되 정부가 일방적으로 하지 않고 노사와 충분한 합의를 거친다’는 원론적 선언에 그쳤다. 주요 쟁점에 관한 한 실질적으로 아무런 합의도 타협도 없었지만 정부는 ‘극적 대타협’이라고 자랑했다.

이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쩍 넘기려는 태도는 현 정부 들어 특히 자주 목격된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언론도 감쪽같이 모르고 지나기 십상이다. 만약 정부 당국자들이 정말 실상 파악을 제대로 못했다면 무능한 정부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든 당장 대통령이나 여론 앞에서 곤란한 순간만 넘기고 보자는 보신주의가 팽배하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정부에 대한 신뢰는 자꾸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온갖 괴담과 유언비어가 많아지는 것도 당연하다. 좀 더 정확하고 명쾌한 정부의 언어가 필요하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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